언론 소비자 주권 국민캠페인이 낸 신문광고와 최후 진술서
조중동에 광고를 내는 것을 중단해 달라는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언론 소비자 주권 국민 캠페인이 최종 선고를 앞둔 지난 1월 23일, 경향과 한겨레에 신문 광고를 냈다. 모금을 해서 냈는데, 너무 많이 모여서 한 번 더 낸다고 한다. 감동의 물결이다.
그 광고를 미디어 한글로가 좀 뿌려주고자 한다. 물론, 경향과 한겨레와 비교도 안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힘이 되라고, 힘 내시라고!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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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번 글 2009/01/22 -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 3년 징역형? 기소만 당해도 좌천? 에서도 소개했지만, 이번에 재판 받은 분 중의 한 분의 "최후 진술서"를 아래에 공개한다.
노로이세이 최후진술서
최후 진술에서 2가지 사안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 조중동 광고불매운동의 확산에 대해서
두 번째,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조중동 광고불매운동의 확산에 대해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건의 개요 및 과정과 알려진 사실들보다도 이 소비자운동이 촉발된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다소 주관적이겠지만 제 나름대로 밝히고 싶습니다.
먼저 인용하고 싶은 것이 있어 말씀드립니다.
한국 현대사의 위대한 사상가 씨알 함석헌 선생님께서 주간으로 발행한 “씨알의 소리”(1970년 4월 19일)자 창간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앞에 것 중략) 정부가 강도의 소굴이 되고, 학교, 교회, 극장, 방송국이 다 강도의 앞잡이가 되더라도 신문만 살아있으면 걱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민중의 눈을 쥐고 입을 쥐고 손발을 쥐고 있으면서 그것을 아니합니다. 그래서 나는 정치 강도에 대해 데모를 할 것이 아니라 이젠 신문을 향해 데모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사실 생각이 있는 국민이면 누가 시키는 것이 없이 불매 동맹을 해서 신문 몇 개가 벌써 망했어야 할 것입니다...(이하생략)”
씨알 함석헌 선생님께서 1970년에 주장하시던 말씀이 세기가 바뀐 21세기, 2009년에도 가슴에 와 닿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봤습니다.
이번 조중동 광고불매운동이 시작된 계기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과 관련하여 촉발된 촛불집회라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재판과 관련된 증거 수집을 위해 지난해 뜨거웠던 다음 아고라나 여러 대형 커뮤니티, 82쿡닷컴, 마이클럽, DVD프라임, SLR 클럽, MLB Park 등 촛불시위와 관련된 게시판들을 살펴보면서 5월 초순 또는 중순경 조중동신문이 촛불시위와 관련되어 왜곡된 기사를 싣는 시기에 각 게시판에서 광고불매운동에 대한 언급은 있었지만 그 때는 확산되지 않고 왜 5월말 경이 되어서야 엄청나게 확산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이 확산된 시기는 5월 말경, 대략 5월 27일부터 31일 사이에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기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기억하시는 분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되어 다시 상기시키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면, 5월 29일 그동안 발표를 미루어왔던 쇠고기 수입고시가 강행되었습니다. 5월 21일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이 되지 않아서 “국민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사과의 담화를 발표한 후 그것에 대해 국민들은 만족할 수는 없었지만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쇠고기 수입고시가 강행되고 촛불시위대를 물대포와 경찰특공대까지 동원해서 강경진압하는 장면이 인터넷으로 생중계되고, 또한 여대생 머리를 군화발로 짓밟는 동영상장면 등이 공개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이 때 이러한 국민의 분한 감정을 조중동이 최선을 다해 기사화하고 정부를 향해 고시 강행에 문제점을 제기하고 항의하는 기사를 많이 실었다면 조중동 광고불매운동은 확산되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촛불집회에 참석하거나 그것을 인터넷으로 지켜보던 시민들, 그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면 아마도 촛불시민들의 조중동에 대한 인식은 바뀌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외면당하고 촛불집회의 본질을 신문에 싣지 않거나 다른 것으로 호도하는 것이 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급기야 소비자들의 최후의 수단인 불매운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촛불집회 시민들의 명예가 훼손되고 조중동과 이명박 정부가 일치됨으로 인해서(오버랩 되면서) 국민들이 더욱 조중동을 싫어하게 된 것 같습니다. 2008년 7월 5일 MBC 뉴스 후 방송프로그램에서 나온 시민들이 “매국노 기자들 절필하라” “조선일보 폐간하라” 등 분노의 찬 구호들이 나옵니다.
국민의 건강권과 행복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아니 그 이상으로 기사를 썼다면 조중동 언론사, 그들에게 주어진 언론의 자유가 빛을 발했을 것입니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어 언론의 자유가 위축되고 암울했던 시대상황에서 서민, 노동자의 삶을 제도권 언론에서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신체제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사가 1줄도 실리지 않던 시기에 더 이상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습니다. 그 선언이후로 민주화 운동이나 서민, 노동의 삶, 암울한 대한민국의 그늘진 곳에 대한 기사화를 점차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것이 박정희 정부의 눈엣가시가 되어서 정권차원에서 광고압박을 통해 동아일보 경영에 위기가 초래되게 했습니다. 이른바 백지광고 사태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 때 전 국민은 물론 멀리 외국 재외 교포까지도 그 백지 신문광고란을 격려의 광고로 채웠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바로 국민을 위해, 민주주의를 위해, 언론의 책임을 다하려는 동아일보의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고 많은 국민들이 나섰기 때문입니다.
이번 촛불집회에서는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은 국민들의 심정을 대변해주었습니다. 기사의 논조나 사실 여부를 떠나 언론을 통해 심정적으로 국민들은 분한 감정을 보상받고 싶어했습니다.
국민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본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일본은 미국산 수입쇠고기를 20개월 미만의 위험부위(SRM)를 제거한 살코기만 들여옵니다. 아무리 미국산 쇠고기가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광우병 위험수준을 벗어났다고 해도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2005년 2월 일본에서 처음으로 인간 광우병(vCJD)으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희생자는 50대 남성이었습니다. 일본 보건 당국은 사망자의 가족과 주치의를 상대로 망인의 평소 건강에 대한 청취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망자에게는 다른 병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수술, 수혈, 치과 치료, 침 치료 등을 받은 사실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평소 일본식 중심의 식사를 주로 하였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떻게 해서, 인간 광우병에 노출되어 사망했는가가 원인을 밝히기 쉽지 않았습니다.
일본 보건 당국은 희생자가 1990년에 영국에서 약 한 달 정도를 체류하였던 사실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아침 식사는 대부분 일본식으로 해결하였으나, 점심과 저녁은 주로 영국의 현지 식당에서 먹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가 영국에서 밥을 먹을 당시 영국은 이미 광우병(BSE) 발생 국가였습니다. 그리고 광우병 감염 소의 숫자가 최고조에 달했던 때였습니다. 반면 영국정부가 소의 위험부위 식용금지조치를 한 때는 한참 뒤인 1996년이었습니다. 결국 일본 정부는 사망자가 영국 체류 중에 인간 광우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일본은 자국 국민의 건강권을 위해 최고 수준에서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당연히 수입쇠고기에 대해 전수검사를 합니다. 제가 이 얘기를 드리는 것은 검역주권을 빼앗긴 지금 아무도 미래에 대해 불안한 요소를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인간광우병으로 죽은 일본인이 기껏 한달 영국에서 체류했는데 15년 뒤에 인간광우병으로 발병하여 사망했으니 광우병에 대한 미래의 불안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광우병 걸릴 확률이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다고 하더라도 단 한 명의 광우병환자라도 발생되면 전 국민이 공황상태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저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선진국은 국민을 위해 미래의 불확실한 요소에 대해 최대, 최고 수준의 예방과 대책을 마련하고 노력하는 것을 후진국보다 휠씬 더 앞서서 하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조중동 신문이 국민의 건강권을 위해 정권이 바뀌었어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문제 제기를 계속했다면 조중동 광고불매운동은 활화산처럼 분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국민의 편에서 주장했다면 조중동에 대한 이미지도 바뀌었을 것입니다.
광고불매운동과 관련하여 표현의 자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광고불매운동은 기업의 업무를 방해하고 기업의 영업권을 침해하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벗어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소비자들이 벌이는 광고불매운동의 양상과 판례를 보면 모두 표현의 자유가 결부된 것이 사실입니다.
이번 조중동 광고불매운동과 관련하여 네티즌들이 고소당한 사실 알리는 중앙일보 인터넷기사 일본어버전에 일본인들이 단 댓글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 말하고 싶은 것도 말할 수 없는 세상이다”라고 한국은 단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없다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로버트 하그리브스라는 사람이 쓴 “표현자유의 역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재판 관련된 것이 아닐지 몰라도 그 책 중에 인상적인 부분이 있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책에 보면 위대한 반대자로 칭송받았던 올리버 윈델 홈스라는 미연방대법관 판사와 관련된 얘기가 있습니다. 그는 수정헌법 제1조의 보호자로 그의 법률가로서의 삶은 논리학이 아니라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법은 오랜 기간 국가가 발전한 이야기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란 수학 책이 오직 자명한 원리와 필연적 결과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다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책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연방대법원 제도는 서구 사회의 독특한 것이다. 말하자면 미국 사회에 세워진 엘리트 지배 시스템이다. 그들과 대통령의 관계는 전통의 보호자로서 중세 봉건시대 군주와 교회의 그것과 유사하다. 개혁의 보증인이자, 전통의 보호자로서 9명의 나이든 대법원 판사들은 법률가이면서 정치인의 역할도 요구되는 것이다. 토크빌은 “평화와 번영, 그리고 통합의 진정한 존재 여부는 대법관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
홈스는 1902년 연방대법권으로 입명된 지 30년 동안 재직하면서 1910, 20년대 당시 언론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가 극히 제한적이였던 시대에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미 연방대법원이 유죄를 지지했던 사건마다 홈스와 루이스 브랜다이스 대법관(이 두 분은 항상 소수의견을 제시하여 소수파로 불리워짐)은 항상 반대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머지않아 미국 연방대법원의 최종평결이 되었고 오늘날 미국 헌법에 반영되어 그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20세기 초반에 재판을 결정한 것은 다수파였지만 미국의 앞날을 결정한 것은 홈스와 브랜다이즈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위한 헌법을 형성하는 데 그토록 깊은 영향력을 가졌던 적은 없었습니다.바로 표현의 자유에 대해 현재의 시점에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재판은 작년 6월에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한 판결이지만 저는 미래에 대한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기소된 24명의 개인들의 미래가 걸린 판결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있어서 표현의 자유와 소비자 운동의 미래에 대한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자유나 기타 인권에 대해 글로벌 기준이나 천부적인 의미를 축소하거나 제한하고 우리만의 규정을 적용한다고 하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고립된 민주주의, 아니 명목상의 민주주의일뿐입니다.
요즈음 경기침체로 인해 여러 공포스런 상황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D(Depression 공황)의 공포, R(Recession 침체)의 공포로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그런 공포들보다 BigBrother의 공포가 더 두렵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어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못한다면 그 사회는 죽은 사회나 다름없습니다.
가끔은 미국의 노숙자, 일본의 노숙자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들 처지에 있어서 당장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경제적 어려움은 있겠지만 표현의 자유만큼은 최대한으로 보장되어 있는 사회에서 지내고 있어서 부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번 조중동광고불매운동과 관련하여 광고불매운동에 참여했던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저희가 선택되어 이 법정에 서게 된 것은 공소사실과 관련된 혐의보다 어쩌면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밝혀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표현의 자유의 수호에 대한 저의 신념을 밝히라고 한다면 다이아몬드와 같은 견고함과 변함없음으로 지킬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덧붙여 마지막으로 영국의 윤리적 소비자 단체 사이트(www.ethicalconsumer.org) 에 있는 내용을 한 가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사이트에 성공적인 불매운동 사례들이 여러 가지 나와있는데 2000년 12월 열대우림네트워크(RAN)가 불매운동 사례는 대단히 위력적이였습니다.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미쓰비시자동차, 전기, 그 그룹에 대한 불매운동은 700,000통의 편지와 그 밖의 전달수단으로 미쓰비시그룹에 대해 5년간 불매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그 불매운동, 즉 소비자 운동에 대해 어떤 소송을 건 사실은 없습니다. 이상입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미디어 한글로
2009.1.28
http://media.hangulo.net